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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 “나를 알면 영화가 보인다”

※ 본 기사는 봉준호 감독의 타 인터뷰 기사를 재구성해 작성했습니다. 

 

봉준호 감독 “나를 알면 영화가 보인다”

 

 

2023년 10월, 넷플릭스에서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를 출시하자 영화계가 주목했다. 90년대 초 시네필들의 공동체였던 ‘노란문’ 회원들이 그 시대를 다시 추억하는 내용이었던 것. 열세 명의 회원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봉준호’

 

군복무를 마친 봉준호 감독은 타 대학교 친구들과 셋이서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으나 사회학과에 진학했던 봉 감독은 영화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영화 한 편에 끝없이 이어지는 토론. 영화 전문 서적이 드물던 시절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공부였다.

 

“영화 세미나, 영화 세계사, 영화 작가론, 영화 이론 등. 동아리에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원서를 직접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영화가 좋았으니까요.”

 

대학 시절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영화 공부는 재밌지만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다음은 어디로 향할까.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은 있으나 방법을 몰랐다. 시험을 본다고,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감독이 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노란문에서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첫 단편 영화였던 <백색인>(1994). 그렇게 그는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다.

 

봉준호 감독 (사진=아레나옴므플러스)

 

- <플란다스의 개>부터 시작해 <기생충>까지. 이십여 년간 장편 영화 일곱 편을 만들며 영화계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이루지 못한 게 있으신가요?

후회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지금까지 개봉한 영화를 보면 늘 후회스러운 점들이 있거든요. ‘편집할 때 저 장면 뺄 걸’ ‘카메라 위치가 달랐다면 훨씬 전달이 잘 됐을텐데’ ‘배우한테 연기 디렉을 다르게 줄 걸’. 모든 작품 끝에 후회가 남았습니다. 작품을 가장 냉철하게 바라보는 건 감독이잖아요. 제 작품에 한해서 가장 냉철한 평론가는 저일걸요.

 

-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완벽주의라는 말을 들으셨을 텐데요. 실제로 어떠신지요.

겸손이 아니라 제 결과물을 보면 완벽주의라고 하기엔 아직 멀었습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돼야 완벽주의라고 당당히 말할 것 같아요.

 

- 자신만의 미학이나 스타일이 있다면요?

영화 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는데요. 미학이나 스타일을 논하려면 앞으로 이십 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반환점을 돈거죠. 적어도 육십은 넘어야 저만의 미학이 생길 것 같아요. 환갑에 <싸이코>를 찍은 알프레도 히치콕처럼요.

 

- 감독님이 생각하는 한국 영화의 거장은 누구인가요?

대단하신 분들 많지만 지금은 김기영 감독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정말 괴이한 천재예요. 군사정권인 60-70년대에 <하녀>를 만들어 금기의 영역을 침범했습니다. 그 시절엔 국가에서 시나리오를 검열했어요. 외화 수입 쿼터권을 따려면 암울한 독재 시기를 겪어야만 했죠. 통제와 감시 속에서 독창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 그거야말로 돌출된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나셨다면 세계적인 거장 대접을 받으셨을 겁니다.

 

- <하녀>의 계단 장면이 <기생충>에서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녀>도 중산층이 파괴되는 과정을 담고 있어요. 이 과정에서 이층집이 상징하는 바가 많죠. 60년대 양옥 이층집은 ‘신식’, ‘부잣집’을 의미하거든요. 특히 계단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요. <하녀>의 모든 것은 영감 그 자체였습니다.

 

- 감독님을 수식하는 단어가 있다면요?

집착, 불안, 그리고 연민인 것 같습니다. 찍고 싶은 이미지, 전달하고 싶은 대사, 스토리가 항상 있어요. 어쩌면 그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 작품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집착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불안은 필수로 따라오고요.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의 작품을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요. 각자의 예민함과 각자만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죠. 제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려면 그들을 계속 설득해야 해요.

불안이 제 안에서 태어난 감정이라면, 연민은 영화 속 인물에게서 태어난 감정이에요. <기생충>의 최우식 배우의 캐릭터를 예로 들어볼게요. ‘기우’라는 인물은 화를 안 내요. 어떤 일을 겪어도 이상하게 낙관적이에요. 모든 걸 감내하려고 하고 자신의 책임으로 과도하게 돌리죠.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냥 연민이 느껴져요.

 

- '기우'를 보면 요즘 젊은 세대가 떠오릅니다.

젊은 세대 관객들이 기우를 보며 공감하길 바랐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기우가 ‘그 집’을 사겠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걸 듣는 우리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가격을 계산했을 때 이 집을 사려면 540년이 걸린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습니다. 이걸 보는 관객도, 저도요.

 

- <기생충>에서 빈부격차가 무엇을 의미하나요?

기택의 가족은 의외로 멀쩡합니다. 바보도 아니고 게으른 것도 아니죠. 오히려 비상함이 느껴져요. 부잣집 상대로 이상한 사기를 치니까요. 일자리가 없을 뿐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나오지만 경비를 뽑는데 면접만 400명을 봐요. 이런 일은 실제로 있어요. 뉴스에서도 종종 나옵니다. 기본 능력도 갖췄고 일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는 상태. 이것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그는 일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대학생 때 과외를 하러 부잣집에 가던 길이 <기생충>에서 기우가 부잣집에 찾아가는 길이 되었다. 친구들과 오대산으로 놀러갔을 때 우연히 본 누군가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마더>에 담기도 했다.

 

“아직도 생생해요. 오대산 국립공원 주차장에 관광버스 한 대가 주차돼 있었어요. 가만히 보니 버스가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겁니다. 착시인 줄 알았죠. 버스 안에서 아주머니들이 춤추는 거예요. 보통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리잖아요. 그런데 도착해서도 흥이 가라앉질 않으셨는지 계속 추시더군요. 그게 참 웃기면서도 슬프고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감정이었습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넣으리라 다짐했죠. 그렇게 탄생한 게 <마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 감독님의 영화는 매번 새롭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어디서 본듯한 영화, 누구를 흉내낸듯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독창성은 제게 매우 중요해요. 오로지 자기자신에 집중하면서 고독한 시간을 쌓으면 결국 독창적인 길로 갑니다. 남이 하지 않은 것을 하는 것. 저부터 그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매번 노력해요.

 

-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자기 자신에게 방점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나리오로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감정을 묘사해야 하는데 이 배우가 한다고 할까’. 걱정과 불안은 하다 보면 끝이 없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찍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뭔지.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트렌드를 따지기 이전에 스스로를 존중했으면 합니다. 나의 진짜 ‘집착’을 찾기 위해서요.

 

 

삶은 늘 영화와 함께였다. <옥자> 후반 작업하던 때를 떠올리면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생각났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연대기가 영화와 기록되었다. 영화와 무관한 개인적인 기억도 없다. 특별한 취미도 없어 촬영 없는 날이면 영화를 보곤 한다. 여전히 그는 영화광이다. 노란문을 드나들던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