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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셀프 인터뷰) 우물 밖 개구리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이 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와 바다의 깊이를 우물만큼 이해한다는 뜻으로, 좁은 시야를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27년을 쭉 한동네에서 살아온 청년이 있다. 올해 그의 나이는 만으로 30살이다. 그는 만 3살에 이사 와 유아기부터 유년기, 청소년기를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청년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인생의 9할을 같은 동네에서 보낸 그는 이십대 중반이 돼서야 우물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 한동네에서 쭉 사신 이유가 있나요?

제가 태어나기 전 부모님은 이사를 자주 다니셨대요. 짧으면 몇 개월, 길면 이 년 정도. 서울에 살 때 집을 몇 번이나 옮겼던 엄마는 이사에 진절머리가 난 거죠. 그런데 27년 전 청약에 당첨돼 운 좋게 이 마을에 집을 얻은 거예요. 이 마을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던 부모님 덕분에 캥거루족인 저는 27년 째 이 동네에 꼼짝없이 갇히게 됐어요.

- 27년이면 인생의 9할인데, 지겹진 않으셨어요?

이십대 중반까지도 지겨운 줄 몰랐어요. 그 당시 제 주변 친구들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래 사는 게 외려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 그럼 지겹다고 느끼신 적이 없는 거네요?

지겹다는 느낌보다 내가 갇혀 있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어요. 스물 다섯에 첫 유럽 여행을 갔을 때예요. 한 달 정도 여러 도시를 돌았는데 서양권 국가는 처음이라 모든 장면이 생소한 거예요. 평일 낮인데도 느린 호흡으로 여유 있게 식사하는 사람들, 자유로운 낮술 문화, 텅 빈 실내와 대비되는 꽉 찬 테라스, 돗자리 없이 공원 잔디에 앉는 사람들,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안부 인사. 그때 처음으로 ‘내 시야가 정말 좁았구나.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구나!' 생각했어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생생해요. 공항버스에서 내렸는데 가장 익숙했던 풍경이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거예요. 마치 모르는 동네에 처음 간 것처럼요.

그에게 첫 유럽 여행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깨달음만 있었을 뿐, 그는 우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여행 이후 그는 우물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주하는 삶이 사 년가량 이어졌다고 말했다.

 

한 동네에 27년 동안 살았던 취재기자26기 김미연은 첫 유럽여행 후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Unsplash

- 우물 밖에 못 나온 이유가 궁금해요. 어떻게 우물 밖에 나오게 되었는지도.

저는 겁도 많고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때는 주체적으로 사는 게 뭔지 몰랐어요.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4년차 직장인이더라고요.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열고 제 자리로 걸어가는데 제 책상 풍경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하루 종일 맴돌더라고요. 한 달쯤 지났을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면서 제 인생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첫 장을 펴면 이 구절이 나오거든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그럼 <데미안>을 읽고 퇴사를 결심했나요.

오로지 <데미안>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지만, 그 책이 방아쇠 역할을 했어요.

- 회사를 그만둔 또 다른 이유는?

앞서 말했듯 저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었어요. 첫 직업도 그렇게 갖게 됐죠. 물론 첫 직업에 첫 직장이라 열심히 일했어요. 직업상 협업이 많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기 싫었거든요. 그렇게 4년을 열심히 다녔는데, 문득 제 인생을 무의미하게 소모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이 일에 쓴다는 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내 시간을 써도 안 아까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내 시간을 써도 안 아까운 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글쓰기였어요. 누군가 “그건 취미로 하면 된다”고 말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평생을 ‘꿈’이라는 카테고리에 가둬 놓았죠. “쓰는 직업은 내 것이 아냐. 그건 남의 것이지”라고 생각하면서요. 패배주의적인 태도로 셀프 가스라이팅을 했어요. 근데 웃긴 거예요. 제대로 도전해 보지도 않고 루저처럼 구는 게. 그래서 도전했죠.

- 진짜 우물 밖으로 나오셨네요. 정말 멋져요.

그쵸(웃음). 삼십 년 걸렸어요. 그래도 서른이면 아직 젊잖아요. 같은 나이의 어떤 사람은 사회에서 자리 잡고 결혼하고 자녀 계획 세우느라 바쁘겠지만, 저는 저를 어떻게 성장시킬지 계획 세우느라 바빠요. 우물 밖으로 나온지 얼마 안 됐으니까 더 부지런해야죠.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해요.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서 에디터로 글 쓰는 일을 시작해 보고 싶어요. 지금 한국잡지교육원에서 4개월 과정 수업을 듣고 있는데 처음으로 공부가 정말 재밌어요. 어렸을 땐 공부가 너무 싫었는데 역시 사람은 다 때가 있나 봐요. 아마 글 쓰는 일로 밥 벌어 먹고살려면 평생 공부해야겠지만요.

그 동네에서 아직 살고 있지만 그는 우물 안에 없다. 그 동네 너머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늘을 보며 우물이 아닌 바다를 유영하는 개구리가 되었기에. 그는 더 이상 우물 안에 없다.